
대구영화학교(Daegu Film School) 4기 수료작 리뷰
글: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정규 4년제 영화학과가 부재한 대구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영화교육 커리큘럼으로 출발한 대구영화학교가 4기 교육을 마무리했다. 앞선 기수 수강생들이 차기작을 통해 전국적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 비슷한 조건의 여러 지역에서 대구영화학교를 벤치마킹해 지역별 영화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도 본 과정의 의의는 작지 않을 것이다. 1기와 2기가 기존의 지역에서 활동하던 감독들의 영향 아래 작업에 참여해온 경력자들 위주였던 데 비해 3기부터는 온전히 신예들로 채워지는 구성의 변화가 있었고, 코로나19로 인해 협력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서 일상으로 회복되는 과도기가 존재했었다. 그런 사연을 품은 채 3기에 비해 집단적인 활동에 제약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4기 영화학교 졸업영화는 공동협력의 기운이 회복되고 앞선 기수들과의 교류를 통해 경험을 전수받아 4편 모두 안정된 연출과 구성을 선보였다.
물론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4편의 졸업영화는 비록 가다듬을 구석은 제법 있지만 참여했던 수강생들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과물들이다. 우선 자신들이 하고픈 주제와 이야기를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게 그려낸 점이 기대감을 갖게 해준다. 또한 공통적으로 동 세대에서 주요한 화두인 여성주의 서사와 취업 등 미래에 대한 고민이 4편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확인되었다. 자기 세대의 고민을 영화에 녹여내려는 태도의 발로일 테다. 아쉬운 점이라면 근래 지역 독립영화계 공통의 쟁점인 ‘로컬’ 색채에 대한 모색이 느껴지는 작품이 없다는 부분이지만 이는 추후 창작자들의 고민이 숙성된다면 해결 가능할 사안이다.
‘혜원’은 서른을 바라보는 대학원생이다. 사회적 ‘밈’이 될 정도로 대학원의 출구 없는 풍경은 잘 알려진 바, 학위라도 따야 장래를 기약하는 혜원은 각종 부당한 조건과 부가업무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그런 혜원에겐 식당을 운영하는 남자친구가 있다. 혜원은 가끔 그의 어린 조카로 엄마가 부재한 유정에게 반찬을 날라주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서먹하다. 어느 날 과제발표를 집어치우고 혜원은 유정의 집을 찾는다. 운동회에 가족 중 누가 참석할 이 없던 유정을 데려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둘은 운동회 대신 교외로 그들만의 소풍을 떠난다.
영화는 과거-현재-미래의 혜원 혹은 유정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는데, 이 작은 탈주는 원래는 그들 각자에게 일어날 수 없는 소소한 일탈을 통해 비로소 구현된다. 혜원은 소풍을 가기 위해 교수와 주변의 평판과 신용을 포기했고, 유정은 꾀병을 부린 덕분에 개근상을 날려먹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원래 예정되어 있던 권태로운 코스보다는 그렇게 작은 스펙터클이 필요한 상황이라 제작진은 주장하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소풍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문득 스쳐지나가는 듯 학교수업을 땡땡이친 여학생 트리오의 수다를 함께 구경하는 찰나다. 세대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혜원과 유정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고리로 훌륭하게 기능하지만 무심한 듯 툭 튀어나왔다 들어가기에 놓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둘만의 소풍을 다녀온 대학원생과 초등학생은 함께 밥을 먹는다. 먹기 싫은 건 골라내다 어른의 편법을 빤히 지켜보는 아이에게 자기는 편식해도 이렇게 잘 컸다며 강변하는 혜원의 농담은 곧 주어진 궤도와 강요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 숨 쉴 틈이 필요하다는 선언처럼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일장연설에 맞장구를 쳐주는 유정. 둘은 어느새 ‘작은엄마’와 ‘조카’라기 보다는 나이차 좀 나는 자매처럼 보이게 된다. 물론 이들의 일탈은 사회적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는 손해만 남을 뿐이다. 유정에겐 큰 문제가 아닐지언정 혜원은 자신의 일탈에 따른 피해를 온전히 감당해야할 것이다. 그녀는 대학원생이지 않은가. 하지만 본인은 충분히 결심하고 각오한 결과일 테니 괜히 오지랖을 피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가끔은 궤도에서 벗어나 휴식이 필요하고 마침 그녀에게 그 절대적인 타이밍이 등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봄날은 조금 특별하게 기억되는 추억으로 새겨질 테다. 영화는 그런 주제의식에 부합되게 잔잔하고 따스한 기운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트리오의 ‘비포’ 연대기 첫 번째 작품 <비포 선라이즈>와 조지 로메로의 ‘시체’ 연대기 두 번째 작품 <시체들의 새벽>의 기운을 합쳐서 둘로 나누면 이런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2022년에 등장한 <비포 선라이즈>는 로맨스도 좀비 공포물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우애와 (수위는 약하지만) 고어 장르물의 기운이 함께 넘실거리는 작업이다. 즉 21세기 한국독립영화의 주요한 축인 여성서사를 주제로, 장르영화 문법을 도구로 삼아 구사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설정과 우리가 주변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사회적 폭력에 대한 공분을 제법 솜씨 좋게 버무려낸다. 그 덕분에 리얼리즘 연출방식이었다면 호불호가 갈릴법한 순간에도 피식 웃게 만드는 블랙코미디로 미끄러져나가는 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제법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별 무리 없이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간대는 제목 그대로 동이 트기 전 심야에서 출발한다. 두 명의 여성이 한 명의 여성과 만난다. 그들은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한 여성의 말대로 30분만 일찍 왔었더라면 더 통쾌한 전개가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엇갈려버렸다. 사건이 저질러진 직후 우연히 만나게 된 세 여성은 극적인 사건의 종결 이후 수습을 머리를 맞대고 치러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자매애로 함께 새벽의 공동작업을 진행한다. 그 작업은 대개 우리가 접하는 강력범죄나 고어영화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반대로 뒤바뀐 형태로 실행되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를 추리하는 재미가 있다.
세 주인공은 모두 동일인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각자의 슬픔과 분노 지점은 다르지만 셋 다 복수의 동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미 복수가 설익게 완수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합쳐 실행하는 기회를 놓친 대신 뒤처리를 분담하게 된 것이다. 그 발상의 전환이 색다름을 주기도 하지만 클라이맥스 대신 에필로그 파트가 길게 늘어진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판단은 관객의 몫이 될 테다.
화면은 (저예산도 고려해) 야간에 대부분의 상황이 진행되는 점을 감안해 거의 전 분량이 흑백으로 촬영되었는데 단 2번 컬러 촬영이 등장한다. 처음 컬러 장면은 줄거리 전개와는 다른 시간대를 다루기 위한 차별성을 위해 삽입되었지만 다음 컬러 장면은 자연법칙에 의거해 일출이 일어난 후 자연광을 살림과 동시에 주인공들의 삶을 가로막아온 기나긴 어둠이 걷히고 (비록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출발이 도래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중의적 표현으로 활용된다. 그렇게 종결을 맞는 이야기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거부감이 휘몰아치는 시류에 대한 응전이자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제에 대한 상상의 복수극으로 귀결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동트는 아침을 맞이하게 만든 공동작업의 결과는 엔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빈’은 옷가게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이다. 도입부에서 그녀는 매장을 찾은 손님에게 자신이 고른 의상을 어필하며 옷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듣다 보면 옷을 팔기 위한 홍보라기보다는 셰에라자드의 천일야화 만담을 듣는 기분이다. 하지만 낭만을 모르는 손님은 그녀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듣고도 구매는 하지 않는다. 크게 상심한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 듯하다. 지빈은 퇴근 후 단골가게에 들렀다 가수 장필순의 1집 레코드를 선물 받는다. 그리고 전 남자친구 ‘무혁’이 금방 다녀갔다는 걸 깨닫는다. 곧이어 그의 예상 경로를 뒤쫓던 지빈은 오랜만에 무혁과 재회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줄거리를 요약하면 몇 줄 채 안 되는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제작진의 의도는 상세한 스토리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 선과 이를 뒷받침하는 도시의 정취일 테다. 지빈과 무혁은 주로 지빈의 의도에 따라 도시 곳곳을 지나며 이것저것 소일한다. 지빈이 은근슬쩍 무혁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거나 추억담을 늘어놓는데 도입부에서 그녀가 매장 손님에게 늘어놓던 이야기가 좀 더 상세하게 언급된다. 지빈은 우연히 재회한 참에 적극적으로 무혁의 감정을 확인(을 넘어 충동)하려 한다. 무혁 역시 끌려 다니는 것 같아도 딱히 언짢은 눈치는 아니다. 20대 주인공들이 자기 세대의 시선으로 만들어가는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무혁은 공원에서 지빈에게 이제 그만 장래를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지만 지빈은 순간순간의 충만함을 아직 놓치기 싫어 보인다. 취업절벽에서 탈출 직전인 무혁이 면접 전날에 갖는 찰나의 휴식을 지빈은 온전히 자신과 함께 하게 만든다. 둘은 그들의 감정이 과거 연인이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과거 연인들이 새 인연을 시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그 대신 영화는 마치 거대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 소소한 도회적 일상이 채워지던 1990년대 전반 문화 사조들과 잇닿은 느낌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지빈이 애정을 보였던 가수 장필순의 전성기 대표곡 제목들은 작품 전개와 기묘한 평행이론을 선보인다. 화면에 등장하는 장필순 1집 ‘어느새’(1989)는 변함없는 일상에 스며들 듯 발생한 낯선 찰나를, 2집 ‘외로운 사랑’(1991)은 헤어진 옛 연인을 찾아 도시 골목길을 헤매던 정취를, 3집 ‘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1992)는 지빈과 무혁이 각자 그리고 함께 거닐면서 엇갈리는 감정을 표상한다. 그렇게 둘은 4집 ‘하루’(1995)를 끝내 함께 보내게 된다. 결국 5집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1997)처럼 둘은 언제고 그렇게 만날 운명이었던 게다. 영화는 2020년대 청년들의 세태에 1990년대 문화적 감성을 연결해 아직 세상에 온전히 타협하거나 종속되기 직전인 청년들의 풍경을 담는다. 시종일관 흐름을 주도하는 지빈의 존재감은 통통 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생동감을 화면에 채운다.
<못>
<비포 선라이즈>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통쾌한 반전으로 돌파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못>은 정확히 그 반대 위치에 서 있다. 전자가 가해자에 대한 공통의 분노로 처음 만난 여성들이 너무나 순식간에 연대의식을 발휘하는데 반해, 후자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집’과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고립무원의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개별 영화에 대한 리뷰와 별개로 여전히 가야할 길이 많이 남은 여성인권 문제에 대한 공통 관심과, 상이한 표현방식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운 이유다.
주인공 ‘선민’은 가족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집에 돌아와도 2층 자기 방으로 곧바로 올라가버리기 일쑤고, 가족들과 식사 자리에서도 섭식장애가 걱정될 만큼 입이 짧은 모습을 곧잘 드러내곤 한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선민의 그런 소극적 면모는 가족 내의 어떤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궁금증을 풀어주는 명료한 해설 대신 영화는 거듭 상징과 암시로 관객에게 어떤 상상을 떠올리게 유도한다. 작품 제목이기도 한 ‘못’은 제조업 공장이라면 쉽게 만날 바로 그 못이다. 선민은 항상 못을 하나씩 챙겨 다닌다. 그녀는 못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다. 못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시각적-실용적 속성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합체되면서 서서히 주인공이 간직한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 중에서도 가장 음성화된 영역인 친족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선민은 그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그녀의 가족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선민을 침묵시킨다. 가해자가 그저 한번 실수한 것 갖고 인생 망치게 할 일 있냐는 논리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주객전도된 기막힌 상황은 주인공에게 침묵과 용서를 강요한다. 희생양이 된 상대적 약자만 참고 잊으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라는 오래된 악습은 여전히 힘이 세다. 모두가 선민이 피해자라는 걸 알지만 누구도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진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리되지 않고 일상에서 수시로 마주친다. 선민은 독립을 꿈꾸지만 그녀의 가족은 가해자의 장래를 위해 돈이 들어가야 하므로 그저 참고 기다리길 권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생면부지의 여성들이 가해자를 향한 공통의 분노로 결집되는데 비해 <못>의 가족들, 딸을 가장 앞장서서 보호하고 보듬어야 할 엄마마저 가족 이데올로기를 거스르지 않는 면모는 주인공의 숨 막히는 처지를 가혹하게 조인다. 그런 일련의 상황이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전염된다.
선민 역을 맡은 배우 이봄의 기용은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연기가 작품 전체의 기운을 좌우하는 점을 깊게 숙지한 제작진 회심의 선택이다. 여러 독립영화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배우의 캐릭터 소화력이 이야기 전체를 견인해주는 덕분에 관객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누수 없이 전달받는다. 영화가 끝난 뒤 성찰과 숙고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