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영화리뷰] 대구영화학교 7기 졸업작품 리뷰
글 김상목(영화평론가,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총평
각지의 독립영화단체와 미디어센터 등이 주관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교육 프로그램인 <지역영화학교> 기획을 선도한 대구영화학교가 2018년 출범 후 2025년 말 7회에 이르렀다. 대학 영화과 등 정규 교육과정 부재를 보완하는 목적으로 체계적 커리큘럼을 통해 매해 12명 신진 영화인을 배출했으니 어느새 80여 명 넘게 지역 사회에 영화 씨앗을 퍼뜨린 셈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변덕스런 사업지원에도 불구하고 빚어낸 소중한 성과다.
이제 대구 영화생태계는 영화학교 전과 후, 즉 서력 기준 기원전ㆍ후 급 변화를 경험하는 중이다. 물론 양적 확대로 모든 게 해결될 리 없다. 늘어난 인력이 모두 영화판에 남진 않지만, 척박한 소규모 생태계에선 이들이 할 일, 감당할 몫, 지속 가능한 터전 조성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절대적 빈곤 상태는 창작자가 일종의 ‘자원 분쟁’에 나서길 유혹한다. 물론 대구만 문제가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복사한 것처럼 비슷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연차가 축적되면서 대구영화학교가 배출하는 이들 사이에도 세대 구분과 기수별 특성이 어렴풋하게 관측되는 중이다. 진행 도상이라 칼같이 분리되진 않아도 추세는 확연하다. 그런 가운데 현장 경험을 갈고 닦은 이들의 재교육 프로그램에 가깝던 초창기 기수 시대는 지났고, 코로나 과도기를 거치며 영화과 신입생 모집하듯 특별한 경력 없이 입학하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 변화상은 점점 심화되는 참이다.
그와 함께 현장 크루 중심으로 공통점이 발견되던 ‘대구 영화’ 경계도 희미해졌다. 지역 특성이 결합한 사회적 모순, 경쟁의 피해자를 섬세하게 조명하며 카메라 너머에서 연민하는 시선으로 구분하던 기준이 허물어진 것. 그와 함께 숱한 시도가 명멸하며 여백을 채운다. 물론 새로운 전형이 확립하기까진 갈 길이 멀다. 어쩌면 특정화가 앞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만큼 백지상태에서 출발해 각자가 품은 꿈을 영화화하는 도전이 각양각색 벌어지는 중이다.
한때 독립영화의 미래, 혹은 대안이라 기대를 받던 지역 영화의 기세는 한풀 꺾인 듯 보인다. 물론 여러 영화제에서 지역 영화에 대한 조명과 부문 신설이 일어났지만, 현상적인 추인에 가까울 뿐, 미래지향적 전망과 더불어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는 것과는 동떨어진다. 그런 와중에 ‘멸종위기종’ 보호 대책 혹은 존재 자체로 시혜를 받는 식의 접근도 종종 엿보인다. 우려되는 상황이라 봐도 좋다.
기대치 감소는 21세기 영화가 급속도로 영상 문법 극대화, 총체적 접근으로 향하는 추세와 분리할 수 없다. 굳이 인공지능 들먹이지 않아도 미래의 영화는 원천이 된 전통적 예술 분야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참이다. 문학적 서사에 기반하는 이야기 구조의 쇠퇴는 드라마 편중 경향이 여전한 대구 영화에도 위기로 작용한다. 아울러 장르 융합과 교차, 가상/증강현실, 장르 활용과 선형적 구조 해체 등 실험 요소도 보완할 과제다.
영화학교 7기 수료작 리뷰는 그런 지형과 더불어 평가해야 한다. 4편의 수료작품은 여전히 극영화 형태에 몰려 있다. 이중 절반은 지역 영화의 희미한 전통, 사회적 연대와 사각지대에 관한 조명을 여전히 유지한다. 하지만 아직 풍부한 삶의 경험이 부재한 청년세대 창작자가 온전하게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폭로하기엔 역부족이다. 그저 시사 문제를 전시하는 것만으론 영화적 성취도 사회적 반향도 이끌기 어려운 실정에 더 예리한 연마가 필요하다.
나머지 절반은 개인의 심리적 불안, ‘내가 중심이 되어 공전하는 소우주’를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사적 경향이 짙어지는 청년세대의 개성과 통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거대 사회적 담론의 해체 후 새로운 통합의 단초가 요원한 가운데 이런 분리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사뭇 염려 섞인 생각도 이어진다. 이중 지역에선 보기 드물던 장르 시도와 사실주의 강박에서 벗어난 흐름은 비록 투박하긴 해도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대구영화학교는 한 바퀴 돌아 다음 단계 출발점에 선 상태다. 어쩌면 평범한 영화과 1학년과 비슷해진 셈. 빈 그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미완의 가능성을 어떻게 발굴하고 육성할까? 기성품이 아니라 창발적 개성을 어찌 북돋울 것인가? 현주소 진단과 변화에 대처하는 응전을 논의할 때다. 7기 수료생들이 첫 영화의 미지근한 반응에 주눅 들지 않고, 장차전을 용기 있게 도전할 때 그들의 성패가 1차 결정될 테다. 이번 리뷰는 그저 한 번 읽고 지우면 족하다.
<초록> (금주영, 14min)




주인공은 미대 입시 실기 시험을 3잎 앞둔 상태다. 학원 연습실 공기는 갈수록 무겁기만 하다. 강사는 원생들에게 장단점을 평가하며 압박 수위를 높여간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 완성도를 확보해야 하니 치밀한 시간 분배와 선택 및 집중은 필수다. 그러나 지적을 받는다고 하루 이틀 새 개선되긴 요원한 일. 색채 표현이 약점인 그녀는 특히 ‘초록’ 이미지 구사에 어려움을 겪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파스빈더의 명작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불안은 폭발 임계점에 이른 상태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뇌내망상은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초록>은 사실주의 서사 대신 의식의 흐름을 표현주의 기법으로 극대화한다. 제작진 의도는 명확하다. 현실 고증 개연성을 일정 포기하는 대신, 인물을 사방에서 조이는 벽처럼 도망치거나 우회할 길 없는 입시생의 폐소공포증을 시각화한다. 비록 여건과 경험 한계로 의도한 만큼 (대개 생명력과 온화함으로 차용되는) ‘초록’의 고정관념을 뒤집은 코즈믹 호러 기운을 총체적 형상화로 구현하진 못했어도 무엇을 추구했는지는 보는 이의 생각에 확고하게 꽂힌다. 나날이 엇비슷해지는 창작 경향에서 확고한 주관은 가치가 커지게 마련.
영화는 개인의 강박적 심리를 온전히 시각화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한국 사회 입시경쟁의 폐단을 고발하는 사회적 환기 역시 부수적으로 추가한다. 제작진이 여기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이 파생 효과를 창출하는 건 명백하다. 예술에 우열을 나눠 평점 매길 수 있다는 불가능한 규격화를 밀어붙인 결과는 낡은 침대에 여행객을 납치해 팔과 다리를 묶고 삐져나오면 자르고 모자라면 뽑아서 늘리던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재림과 다를 게 없다.
주인공이 겪는 끔찍한 수난은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파탄이 아닌 사회적 재난이다. “초록은 동색”의 원래 뜻은 사전적으로 ‘서로 처지나 부류가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함’을 이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초록의 질감은 이를 한참 초과한 지 오래다. 극단적 획일화로 개인의 창의와 개성을 억누르고 말 그대로 모두를 같은 색깔로 덧칠해 버리는 소리없는 폭력의 색이다. 장래가 걸린 미대 입시를 포기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잘하는 걸로 돌파하고 싶던 주인공의 소박한 꿈은 ‘현실론’을 내세운 강사의 권위 앞에서 끝내 무너질 운명이다.
작품은 전통적 이야기 중심이 아닌 시각 이미지의 극대화로 한 인물의 꿈이 스러지고 사회를 잠식한 낡은 고정관념, 혹은 입시를 포함한 평가 시스템의 부당한 획일화에 맞서다 끝내 패배하고 마는 비극적 영웅 서사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어디 미술뿐이랴. 전국의 수많은 대학 영화과에서 마치 영화제에 뽑히기 위한 족집게 족보로 찍어낸 익숙한 답습을 숱하게 쏟아내지 않는가. 청소년 시절 번득이는 총기를 보여 기대했건만, 내놓으라 하는 영화과에 진학한 후 오히려 범재가 되거나 성장하지 못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동맥경화가 심각하다.
제작진은 흔히 ‘대구 영화’라 불리는 불명확한 경향과 확연히 차별화한 결과를 세상에 공개했다. 물론 만듦새에 관해선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출발의 영화’로 드러낸 지향은 현재 지역 영화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새로운 바람의 촉매가 되리란 기대를 갖게 해준다. 몇몇 바디 호러 장르의 아이콘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습작과 모사를 거치며 자신만의 문법을 형성해가는 것. 대구 영화의 공백과 틈새를 포착한 <초록>은 다음 도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단 한 사람> (김민아, 16min)
너무나 사소한 일임에도 마음이 닫히면 절대로 닿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과거엔 가족과 친척, 동네 이웃들의 대소사를 누구나 훤하게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살았다. 물론 예전의 공동체가 목가적인 이상향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끔찍하고 진저리나는 억압과 폭력의 연좌제나 다를 바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개인이 온전히 소외되거나 방치를 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근대 농경 사회의 필연적 특징이다. 하지만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식이다.
반대 급부로 우리는 익명성이 기본값인 ‘이촌향도’ 현상 결과물인 오늘을 산다. 고도로 도시화된 한국 사회는 친지도 남이나 다를 바 없고,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각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파악할 수 없다. 원자화된 개인, 폐쇄적 작은 사회가 기존의 마을과 시민사회의 이상향인 열린 광장 모두를 밀어내고 잠식한 상태가 현재 진행형이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소외와 방치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하지만 개선 기미는 희박하다.
<단 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 감춰진 개별의 상처와 방조를 조준하고, 작은 씨앗의 가능성을 긍정하려 한다.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대충 키워지는 아이가 있다. 그 집 2층에 세입자로 들어온 여성은 주인집 손녀에게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소녀는 마치 ‘늑대 소녀’처럼 거칠고 무분별하다. 건드리면 물려는 듯 손을 뿌리치고 통 말을 듣지 않는다. 대관절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소녀는 접근을 경계하지만, 오히려 타인이 다가오길 갈망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가가면 도망치거나 피하고, 멀찍이 간격을 두면 구조를 바라는 새끼 맹수처럼 은근슬쩍 오히려 거리를 좁힌다. 한참 동안 숨바꼭질이 계속된다. 친근해진 것 같다가도 돌발 행동을 일삼는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할까? 여성은 주인집 손녀에게서 누군가를 투영한다. 그녀가 간직한 감정의 덩어리를 간신히 수습한 줄 알았는데, 소녀의 존재감은 다시금 옛 생채기를 소환한다.
엄마와 딸뻘 두 여성의 버디 무비 <단 한 사람>은 단순명료한 이야기 진행을 취한다. 각자 결핍된 상태로 도움과 관심 절실한 이들이 우연히 만난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가능성은 있지만, 한 번 들어앉은 트라우마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방해한다. 꽁꽁 얼어붙은 문을 열려면 다소간의 인내와 손을 물릴 각오가 필요하다. 악의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다가오는 손길을 무조건 물고 뜯으려 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관찰, 일정한 공감이 필수다.
영화는 천천히 묵묵하게 그 여정을 밟는다. 앞으로 갈 길은 멀어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 봄의 새싹이 엿보인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인상적인 장면 대비가 소녀의 변화(성장)을 확정한다. 선한 의도와 굳은 믿음에 기반한 작업이다. 하지만 좋은 취지가 반드시 완성도를 담보해주진 않는다. 제작진의 과업은 이를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성패가 본 작품의 ‘격’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테다.
21세기 영상 문법의 백화제방이 요란한 가운데 이 작품은 투박하게 정해진 서사를 펼치기 급급하다. 즉슨, 기본 줄거리를 안다면 화면에 집중하지 않아도 소화할 수 있다는 것. 영화만이 갖는 마력을 스스로 놓아버린 실기를 범한 셈. 시나리오 영상화와 영화는 동의어가 아니다. 좋은 취지와 부단한 노력에 끼얹을 한 방이 더 필요하다. 그냥 착한 영화는 도파민 중독의 시대에 시선을 끌기 힘들다. 관객을 유혹할 필살기를 조금 더 연마하자.
<사랑 후에 오는 우울> (김아인, 20min)
변두리 작은 카페를 홀로 운영하는 주인공, 아침 일찍 출근해 일터에서 종일 보내다 밤늦게 퇴근하는 일과가 반복된다. 창문 너머로 카페로 다가오는 손님과 더불어 계절의 변화도 한눈에 들어온다. 시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고 슬슬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어오는 참이다. 날씨가 그래서인지 요즘 카페 주인은 우울감에 빠지곤 한다. 과연 자신이 겪는 감정의 원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아련한 기억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주인공이 겪는 우울은 자신 곁의 빈자리 때문이다. 회상 플래시백을 통해 그녀만의 ‘벨 에포크’, 좋았던 옛 시절이 화면에 형상화된다. 가게 문을 닫은 후 홀로 야식과 맥주로 긴 밤을 보내다 잠드는 오늘과 달리, 과거의 그녀 옆에는 허전함을 채워줄 상대가 분명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던 상대와의 즐거운 추억이 떠날 생각도 않고 쓸쓸한 지금의 그녀를 들볶는 참이다. 자꾸만 과거는 낭만적으로 이상화하고, 그에 비례해 현실은 초라해진다. 어떻게든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주인공은 이것저것 애쓰지만, 공허함은 그치지 않는다.
<사랑 후에 오는 우울>은 지독하게 직설적인 제목을 갖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시간 순서에 의한 과거와 현재의 구분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간대를 뒤섞기만 하면 관객이 혼란할 여지가 있으니 선을 구분하는 기준 설정은 필수다. 아무리 사적인 경험담에 기반한 이야기라 해도 막가면 곤란하다. 주인공의 머릿속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횡단하는 항로에 안전대책을 강구하고자 제작진은 제법 공을 들여 표지판과 이정표를 설치해 놓았다. 보물찾기하듯 숨은 장치를 발견하며 깨알 같은 부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영화의 기본 정서는 낭만적 복고 vs 낙원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망실한 현재의 대비다. 아무리 현세에 충실하려 해도 도무지 과거의 행복감을 이길 도리가 없다. 승부는 시작부터 결정된 상태다. 패배자의 우울한 정조가 화면을 시종일관 지배한다. 그런 정서에 발맞춰 제작진은 멜랑꼴리한 클래식을 과거 회상에, 일상 생활 소음을 현실 시점에 배치해 관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겪는 우울의 심연을 극대화하려 시도한다. 덕분에 보다가 실종될 일은 그리 없어 보인다. 의외로 친절한 작품이 아닌가.
작품은 철저히 개인의 일상, 거대 서사와 분리된 ‘나만의 우주’를 공전하는 외톨이 행성의 위치를 점유한다. 세계가 망하건 말건 당장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실존 외엔 무의미하다. 이 끝나지 않는 ‘희망 고문’과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저갱의 ‘싱글 지옥’ 앞에서 다른 모든 건 사소할 뿐이다. 그런 정서에 착목하고 극대화하는 기획의 목적은 짙은 안개처럼 영화를 휘감고 보는 이까지 벗어나지 못하게 전염시키려는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세계가 정지된 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주인공(과 닮은 꼴 현실의 우리들)은 시간여행이 발명되지 않는 한 닿을 수 없는 미혹, 발버둥을 쳐도 놓아주지 않는 꿈에 결박당한 상태다. 너무나 달콤한 환상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더 치명적이다. 보이지 않는 우울의 사슬은 그녀를 꽁꽁 묶어두고 도무지 풀어줄 생각이 없다. 과연 영화가 끝난 후 주인공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첫 영화를 완성한 이들이 아직 ‘이후’까지 염두 판단하긴 벅찬 법. 스크린의 안과 밖,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모험 출정을 기다리며.
<별 볼 일 없는 곳> (안수빈, 18min)
시골 변두리에 소재한 한적한 천문대. 주인공은 일반 직원으로 여기에서 일하며 전문직 연구원을 준비한다.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했기에 처우도 낫고 우주를 향한 꿈도 꿀 수 있는 연구원은 당연한 목표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열심히 대비했는데 국가 예산 삭감으로 올해는 아예 모집이 취소될 판이다. 벽지에서 오직 그것만 바라보며 견디는 청년의 권태와 피로는 나날이 심해져만 간다.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나날이다.
이렇게 벽지에서 푹 썩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계속될지 주인공은 알 까닭이 없다. 그런 그의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한 답습으로만 묘사된다. 하두 깡촌이라 치킨 한 마리 배달받기도 어렵다. 이렇게 서글플 수 없다. 한숨과 비통함이 주변의 깜깜한 풍경과 어우러져 그를 포위한다. 과연 불안한 미래에 시달리는 청년이 더 버틸 수 있을까? 보던 관객도 조마조마하기 시작한다.
구원의 동아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까? 제작진은 아직 이를 믿고 희망을 걸어보려는 듯하다. 주인공은 자기를 구원하고자 초심을 떠올린다. 나는 왜 천문대에 지원했던가. 어릴 적 경험한 광활한 우주의 매혹과 인간의 범용함으로 측량하기 힘든 광대무변함이 소년 시절의 그를 이끌어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초라해도 자신의 출발과 어울리는 소품을 창고에서 찾아낸 그의 표정이 뭔가 다르다. 작은 변화의 서막이다.
여기에 사소한 오해와 불화를 치유할 구원투수가 등판하는 경사가 겹친다. 마치 자신의 시작을 보는 것 같은 과거의 ‘나’와 닮은꼴 방문객이다. 덕분에 주인공은 자신의 꿈을 돌아보며 아직 포기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충전한다. 요즘 기초과학 분야 투자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걸음을 이어갈 이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좌절의 위기에서 스스로 구원하는 긍정 서사의 소박함이 여백을 채운다.
<별 볼 일 없는 곳>이란 위트 있는 제목의 작업은 독립영화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자 동시에 테마를 고정하는 역효과로도 치명적인 청년실업과 꿈을 잃게 만드는 사회 현실을 기본 토대로 다소 색다른 소재를 변주해 풀어내고자 한다.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다수의 학생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기본 유형에 살짝 이색적인 배경을 몇 숟갈 끼얹은 소품 격이다.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에 청년의 꿈과 우주라는 낯선 대상을 결속하고, 21세기 들어 사회파 영화의 기본 태도라 할 현실 단면의 관찰과 세밀한 풍경화 같은 묘사 속 개인의 태도를 조명하는 작업은 일정한 친숙함과 낮은 진입 장벽의 이점과 함께 과도한 일반화에 도매금으로 흡수될 위기를 함께 지닌다. 평범하면 눈에 띄기 힘든 요즘 영화판에서 너무 안전빵 선택인 셈이다. 그로 인한 득실은 확연히 나뉜다.
훈훈하고 개운한 뒷맛을 남기지만, 자극적인 캡사이신에 입이 얼얼한 상태에서 본 작품을 주시하지 못하고 건너뛰는 관객은 적지 않게 나올 테다. 그런 세태를 원망만 하긴 힘들다. 21세기 영상문화 범람 가운데 선택을 받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과 창의를 합해도 모자라다. <별 볼 일 없는 곳>에서 은은한 별빛을 쬐기 위해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고심이 제작진의 두 번째 영화를 규정할 결정적 계기로 작용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