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리(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가족의 요소, 혹은 가정이라는 압박에서의 여성에 관하여
‘무정’은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여성이다. 무정은 전남편 ‘기철’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와의 이별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아들 ‘온유’로 인해 그것이 마냥 쉽지 않다. 온유는 자꾸만 무정 몰래 사라져 기철을 만나러 가고, 무정과 재혼한 남편 ‘기영’은 무정만큼이나 온유에게 관심을 쏟지는 않는 듯 보인다. 무정은 가정의 화목함을 지켜내기 위해 온유의 성씨를 바꿔내고자 세 남자들 사이에서 부단히 애를 쓴다.
<가족의 요소>는 그 제목에서 예감할 수 있듯 가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엄마인 무정은 온유를 훈육하면서, 혹은 통제하면서 온유의 선택을 강제하려고 한다. 동시에 아내인 무정은 역시 남편(들)에게 온유에 대한 그녀의 선택을 들이밀며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세 남자들은 그들의 무관심 혹은 아집으로 무정을 번번이 낙담시키고야 만다. 세 남자들은 무정이 원하지 않을 때에 다가오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입을 다물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무정은 온유의 성씨를 바꾼다면, 그래서 김온유가 정온유가 된다면 그녀 앞에 놓인 많은 혼란들이 말끔히 해결될 것이라는 듯 온유의 성본 변경에 몰두한다. 극중에서 무정의 성씨가 무엇인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무정이 온유에게 저 자신의 성씨를 물려주려는 선택을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지점은 우리로 하여금 가족, 여성, 그리고 제도에 관해 다시금 의구심을 갖도록 만든다. 가족을 위해 그토록 부단히 힘쓰고 있는 무정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성씨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혹은 물려주고자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무정이 그토록 원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성씨가 같은, ‘단란한’ 혹은 ‘화목한’ 가정의 형태는 과연 무엇일까. 작품을 보면서 도출된 몇 가지 의문들은 우리가 꿈꾸는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가 여성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관객 저 자신을 포함해 우리 주변의 여성들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 영화의 독특한, 그리고 또 다른 훌륭한 지점 중 하나는 편집의 방식에 있다. 그토록 잘 포개어진 마음들을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해놓아 섣불리 일그러지는 법이 없도록, 말들이 거추장스레 여겨져 혹여 부담스러워지기 전에 영화는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낸다. 부족하지는 않되 너무 많은 정보로 그 ‘적절함’들이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저 자신의 유예기간을 세심히 숙고한 연출자의 고민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때로 이 영화는 쇼트의 절제된 배열 위에 카메라의 위치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옮기거나 소리를 변형시킴으로써 그 의도를 더 생생히 전달하기도 한다. 덧붙여 <가족의 요소>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호연과 상황에 충실한 메타포들, 그리고 무정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구성된 화면을 살펴보는 재미로도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모든 사건들을 거쳐 여름날의 태양빛이 작열하고 매미 소리가 따갑게 울리는 가운데, 그토록 지난한 과정을 겪어온 무정은 이 영화의 끝에서 결국 자신 나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어떤 의문들 사이를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금동현(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롤랑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의 한 문장을 검은 화면에 띄우는 것으로, 영화 <고스트 타운>은 시작한다. 그대로 옮기자. “ATOPUS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것. ─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중에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나는 이 문구를 이루는 세 가지 문장 ⑴ ATOPUS ⑵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 ⑶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것, 각 문장이 어느 정도 <고스트 타운>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서술의 편의를 위해 거슬러 가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것
두 번 이상 보아도 〈고스트 타운〉은 정체를 잡을 수 없는 영화다. 영화의 중반부를 소묘해볼까? 조금 길어도 용서해 달라. 나는 하소연을 하고 싶으니까. 단짝 친구 사이인 무늬와 시원의 대화다. 울리는 전화를 받지 않은 시원에게 무늬가 말을 시작한다.
무늬: 왜? 받어. / 시원: 헤어질까?
무늬: 왜? 넌 여자친구 없으면 안 되잖아. / 시원: 둘 다 없으면 안 돼.
무늬: 응? / 시원: 여자친구 말고, 다른 하나는 누군데.
무늬: 응? / 시원: 둘 다 만난다고.
이 대화를 마친 무늬는 유흥주점의 마담으로 보이는 시원의 엄마에게 가서 “아줌마처럼 꾸미고” 가게 앞에 서면 웃기지 않을까 하여 진한 화장을 하고 시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애인과 함께 들린 시원에게, 그가 자신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말한다. 시원에게 뺨을 맞은 무늬는 집으로 달려가는데, 웬걸? 집에는 시원이 자고 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시원은 없다.
가급적 생략 없이 전체 30분 중 약 20분을 옮겼다. 무늬는 어떤 이유로 시원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시원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오묘한 표정을 짓긴 한다만…) 시원은 어떻게 유흥주점에서 무늬의 집으로 이동한 걸까? 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 시원은 유령이거나 무늬의 환상이다. 영화는 그 (사회적) 맥락을 지정해주기 위해 화면에 커다란 현수막을 띄운다. “제값 주고 샀더니 헐값에 팔리는 형국! 불법 점유자들은 땅을 떠나라!” 적법한 거주권을 갖고 있지 않고 살아가는—혹은 살아갔던?—그들 사이를 영화는 배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화의 말미에, 알 수 없음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해석적 역량을 끌어들였을 때에야 희미하게라도 보이기 시작하는 요소다. 관객이—영화를 그저 잊는 것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해석적 역량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영화가 최소한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
〈고스트 타운〉의 카메라와 음향 등은 의미와 정서 양편에서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유난할 정도로 다양한 선택(광량의 제한, 핸드헬드·슬로우 모션 등을 비롯한 ‘표면에 인식되는’ 기법들)을 하기에, 이 각각의 선택이 어떤 효과를 위해 복무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퍼킨스의 기준을 빌리자면 이러한 측면—영화적 환영을 깨는 두드러지는 기법은 실패가 분명하지만 구태여 너무 고전주의적으로 가지는 말자. 일종의 “불법 점유자”들처럼 존재의 장소가 정박되지 않는 사람의 정서가 내용: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형식: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곧 각각의 형식이 특정한 효과나 정서를 주기 위해서 고안된 게 아니라 (내용과 더불어) 모종의 질서를 찾기 어렵고 그런 유혹도 느끼게 하지 않음으로써, 어지러움이나 곤란함 자체에 형식‘들’의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마음씨 좋은 선해(善解)다. 왜냐하면…
ATOPUS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비-장소,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하는 배회와 외로움의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방식의 예술적 형상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고스트 타운>은 그 최소한의 완성도에도 미달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사용되므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제사인) '사랑의 단상'에서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의 유일함—분류되지 않는—을 설명하고자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들고 왔다. 사랑의 대상은 분류하는 행위 자체를 무화하게 할 정도로 일련의 충만감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고스트 타운>이 전달코자 하는 소속되지 못함의 감각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이는 바르트에 대한 고도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번역본으로 두 쪽 가량—내용이다. 영화의 평론에서 감독의 바르트에 대한 오용(誤用)을 너무 지나치게 흠잡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러한 무책임함이 <고스트 타운>의 전반에 가득한 걸 어떡할 것인가. 아토포스의 철자가 ATOPOS임에도 ATOPUS라고 옮겨둔 것처럼 말이다.
박정윤(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소윤은 스물일곱, 공연을 앞둔 밴드의 기타리스트이다. 공연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소윤은 계속 같은 부분에서 연주 실수를 한다. 소윤의 안에선 ‘연습하면 될 거야.’ 하는 긍정적인 마음과 ‘이틀 가지고는 절대 안 돼.’ 하는 현실적인 마음이 충돌한다. 결국은 소윤의 선택이다.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하고 공연을 망치는 일과, 음악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일 둘 중 그나마 덜 최악인 것을 고르면 된다. 소윤은 후자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기타를 잡지 않겠다는 듯 일렉기타와 앰프를 팔아버린 소윤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음악을 계속 생각하느라 오락가락한다.
‘락’으로 끝나는 단어에 ‘락(rock)’ 혹은 ‘락(樂)’을 붙이는 것은 최근 유행하는 말장난이다. 나락도 락이다, 도시락도 락이다, 그리고 <오락가락도 락이다>처럼.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락가락도 락이다>라는 제목에 아주 충실하다.
영화는 기타를 들지도, 그렇다고 놓지도 못한 상태로 바장거리는 소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종종대며 오가는 걸음의 양 끝엔 상반된 두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소윤은 음악을 사랑하지만,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기엔 겁이 많다. 소윤은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고 싶지만, 이 상태로는 절대 무대엔 오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독한 회피형인 소윤은 밤새 연습하는 일 대신 잠드는 방식으로, 기타를 파는 방식으로, 같은 밴드 선배의 연락을 피하는 방식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무책임한 도피도 또 없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소윤의 필사적인 외면에서 음악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일 앞에선 겁을 먹게 되기 마련이니까. 한국 사회에서 스물일곱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다. 음악은 잘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또 주변에 증명하기 위해 소윤은 알게 모르게 훨씬 간절해지고 훨씬 다급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반복되는 실수를 마주하는 건 소윤에게 가장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짐작되다 보니 책임감이 없다며 소윤을 질책하기도 어렵다. 영화에서 소윤은 신경질적으로 굴었고, 버럭 소리를 질렀고,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기타를 잡은 순간만큼은 신이 나 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리듬을 탔고, 무서운 속도로 몰입하곤 했다. 자신의 상황이나 남들 시선 같은 부가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을 땐 소윤은 기타를 연주하는 게 마냥 즐거워 보였다.
관객은 아마 영화를 보며 소윤이 무대 위에 선 모습, 계속 틀렸던 부분을 무대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모습, 다툰 친구가 무대 아래에서 소윤을 향해 박수를 치는 모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마무리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소윤은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친구와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김이 빠졌는가? 허무했는가?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소윤의 감정을 따라 하루를 꼬박 함께 걸어 다닌 관객은 소윤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에 있는지를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소윤이 아무리 오락가락해도, 결국은 ‘락’을 선택하게 될 거다. 이 ‘락’은 ‘락(rock)’ 이기도 하고 ‘락(樂)’ 이기도 하다.
소윤은 마치 일렉기타와 같다. 앰프가 없으면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는 일렉기타. 당장 소윤에게 앰프는 본인의 실수를 더 크게 드러나게 만드는 두려움이겠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드디어 관객 앞에 섰다는 증거가 되어주진 않을까. 소윤의 방 안에 가득했던 인형들은 동그란 눈으로 소윤을 응시하며 압박감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는 소윤의 공연을 지켜봐 주는 관객이 되어 응원을 전하기도 했던 것처럼.
김건우(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유독 여름이라는 계절은 추억과 가깝다. “여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당신은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날이 갈수록 여름이라는 계절은 점점 더 더워지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맞춰 우리네 삶도 점점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또, 여름은 휴가의 계절이다. 더위에, 일에, 삶에 지친 사람들이 바다로, 계곡으로 떠난다. 겨울에도 휴가가 있지만, 여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 겨울에도 여름의 온기가 남은 남쪽의 바닷바람을 맞으러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여름 바다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인간이 품은 열기를 식히는 시원한 느낌이 있지만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가은 감독의 <여름, 아빠>는 그런 여름의 정서를 가득 담고 있다. 영화는 새벽 철야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용화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가 침대에 누워 잠에 드려는 찰나, 서울로 떠난 딸 여름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무룩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선 딸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놔두어선 안되겠다, 판단이 선 용화는 여름을 데리고 근처 바닷가로 짧은 휴가를 떠나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가족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용화는 일의 피로도 잊은 채 튜브와 여러 물놀이 기구를 가지고 여름과 함께 집을 나선다.
<여름, 아빠>가 포착하는 여름 바다는 정말로 낭만적이다. 여름의 햇빛과 공기를 한껏 품은 찬란한 물결 빛과 푸르른 풍경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마저도 현실의 문제를 잊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마치 영화에서 바다를 보자 잠시 생각에 잠긴 여름처럼, 이 영화는 “여름”이라는 계절과 “바다”라는 자연이 가진 감성을 무기처럼 활용한다. 여름 바다를 활용한 수많은 순간들이 있지만 <여름, 아빠>에서의 경험은 실로 아름답다.
하지만 <여름, 아빠>가 오직 여름의 기운으로 추동하기만 하는 영화는 아닐 것이다. <여름, 아빠>는 결국 “아빠”라는 존재의 이미지에 도달하는 영화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치열한 일상을 살다가 어떤 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을,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가? 영화의 시작에서 여름이 아무 말 없이 용화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용화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온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용화도 여름과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격렬한 젊음의 시기를 지나 온 부모님들께서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에서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함을 선사해주는 것이다. <여름, 아빠>의 지향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여름, 아빠>의 용화는 사실 아직까지도 일을 치이며 사는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새벽 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도 추가로 일을 할 수 있는지 요청받는 것이 보통인 그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름이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떠난다. 용화는 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용화는 여름에 대한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얻은 피로를 집에서 만이라도 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그런 의무감은 필시 그가 가지고 있던 부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쳐 돌아온 딸에게 어떤 일말의 행복한 추억이라도 선물해야한다는 그 간절한 소망, 그 소망은 여름에게도,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리는 모두 여름방학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매일매일 학교에서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선생님과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가 여름날, 혹은 겨울날 집에서 부모님과 보냈던 그 몇 주간의 쉼이 그때는 그렇게 행복했다. <여름, 아빠>는 어린 시절 그 여름날에 가족들과 보냈던 며칠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준다. 따라서, <여름, 아빠>는 시간이 선사하는 영화의 마법을 통해, 이제는 다 커버린 우리들에게 잠시 잊고 있던 휴식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고, 그 잠시간의 숨돌림으로 다시금 극장 밖에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고맙고도 소중한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