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욱(영화평론가)
사회적 관계를 맺다 보면 가끔 나와 타인이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가치관, 사는 방식, 환경, 물질적 토대, 계급 등이 큰 차이를 보이면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거나, 절대 그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 없을 듯한 느낌. 분명 같은 종(種)에 속하는 동질 개체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은 맞는데, 세계에 대한 이미지(혹은 세계 작동 원리에 대한 이미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는 난감함.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살아가는 세계가 실제로 다르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그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세계관의 현격한 차이가 타인과 나를 공존하기 힘든 다른 세계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 같다.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바로 그러한 이질적 세계의 평행선을 다룬다. 신도시 개발계획이 있는 마을에 초등학교 6학년생 기준(이재준)이 전학을 온다. 곧 사라질지 모를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을 아들이 받을 수 있도록 기준의 엄마(고서희)가 고집부려 내린 결정이지만, 정작 기준은 마을의 결손 가정인 영준(최우록)과 영문(최현진) 형제와 가까워지면서 엄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들의 간극을 지켜본다.
기준이 영문/영준 형제와 가까이 지낸 이유는 얼마간 짐작된다. 기준은 영문이 돈을 빌린다는 핑계로 찬수(이호)에게 돈을 갈취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을 때린 사람을 영문이 대신해서 응징하는 것을 본 뒤, 영준과 영문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더니 그 형제를 쫓아다니듯 그들의 마음을 사려 한다. 그러다 점점 영문을 흉내 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준이 힘과 권력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점을 직감한다.
시골의 작은 학교에 전학 오는 것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만큼, 누군가를 힘과 권위로 제압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준에게 결핍을 채우는 시도와도 같았던 걸까. 그렇게 기준은 영문이 지배하는 세계에 진입하려 한다. 하지만 그 세계에 속하고 싶다고 해서 그 세계에 진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다.
기준모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이해되지 않은 세계의 존재와 그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이기도 하다. 기준모는 마을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데, 그런 노력이 아들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그 자신이나 관객인 우리도 판단하기 힘들다. 그리고 자기만큼 아들 기준에게도 진입하고 싶은 어떤 세계가 있다는 점을, 그런 세계를 욕망하는 것으로 인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한, 영문/영준 형제를 걱정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 형제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병기 감독은 이렇게 서로 이해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들을 영화 내부에서 충돌시키거나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한다. 기준모는 기준의 동급생이자 학급 반장인 석호(정준)가 자신의 집에 놀러 오면 양말을 벗는다면서 웃으며 말하는데, 급기야 나중에는 집안 이곳저곳에 양말이 숨겨진 듯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해하기 힘든 세계의 흔적이 우연하고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자신의 (안전하고 문제없다고 상상되는) 세계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문을 넘어 들어온 돌과 게임기 패드 또한 불가해한 세계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진입하는 것을 날카롭고 서늘하게 드러낸 형상으로 자리한다.
영준과 영문이 제도 바깥에 있다는 점을 들어 <여름이 지나가면>이 사회의 부재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정작 부재한 것은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영준과 영문에게도 자신들만의 사회(즉, 자기뜻대로 통제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기준모는 아들에게도 아들만의 사회(즉, 아들 스스로 욕망하는 사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차라리 이 영화는 사회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회적 세계들이 결국 조화하지 못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불화는 애초부터 무의식적으로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네가 걔들하고 놀 수준이야?”, “네가 밖에 있는 애들하고 같은 줄 알아?”라는 말들은 다른 사회적 세계를 나/우리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백이자 선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병기 감독은 그러한 불화에 관객마저 연루시킨다.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영준과 영문의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영문이 기준에게 게임기를 새로 구입해서 보상할 것으로 예상했나? 영문이 기준에게 신발을 새것으로 돌려줄 것으로 짐작했나? 아마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우리 또한 영문이 자신의 힘의 취해 기준을 아무렇게나 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난제는 CCTV 화면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특이한 지점은 영준이 매번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궁핍하더라도, 티셔츠 하나로 여름을 나는 것은 무리다. 더운 여름에 땀에 절은 옷을 입고 학교를 오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여름 티셔츠는 돈이 많이 들지도 않을뿐더러, 영문도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그런데도 유독 영준만 매번 똑같은 파란 티셔츠를 입는다. 이렇게 시설에 들어간 뒤 옷을 바꿔 입고 나올 때까지 한 벌의 의상으로 설정된 것은 영화 후반부 CCTV 확인 장면을 위해 마련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준의 신발을 가져가는 것에 연루된 아이는 셋으로 보이고, 그중에서 파란 상의를 입은 영준만이 확실하게 식별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발을 가져간 것이 영준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CCTV 영상은 신발을 가져간 사람을 특정하기 힘들 만큼 저하된 화질을 보여주지 않나? 여러 정황상 영준이가 가져갔을 개연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영준을 범인으로 단정하는 것 또한 우리 선입견 때문은 아닌가?
이러한 곤란은 신발 가게의 CCTV 화면을 우리가 보지 못했다는 점과 이어진다. 신발 가게에서 옷과 신발을 훔친 것은 영문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영준의 경우처럼 여러 정황이 영문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오해할 소지는 없는가? 아디다스 지점 점원이 범인을 기준모라고 오해했듯이(“서울말 쓰고 재수 없는 아줌마”), 우리 또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영문을 오해할 여지는 없는가? 우리도 단편적인 정보와 인상으로 영문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처럼 장병기 감독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남기며 관객인 우리 또한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점을 알린다(PC방 건물 계단 중간에 난 문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우리는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나?). 엔딩크레딧에서 계속해서 들리던 오토바이 소리처럼, <여름이 지나가면>은 관객이 진입할 수 없는 세계를 남겨 놓으며 질문과 과제를 전한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닿을 수 있을까? 그 간극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