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영화리뷰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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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다> 리뷰

김상목


장편영화는 단편영화 분량을 잡아 늘린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쉽게 예를 들자면 단편소설 vs 장편소설 차이와 같은 문제다.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은 단편으로 출발해 장편으로 도약하길 꿈꾼다. 호평 받은 단편 연출작은 장편으로 가는 길에 포트폴리오가 되어준다. 단편영화로 가능성을 인정받아 제작지원을 얻어내면 장편 데뷔 경로를 취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감독에게 기회가 주어지진 않는다. 장편연출에 진입해도 끝난 게 아니다. 단편에선 빛을 발했던 감독의 장기가 장편에선 그만큼 발휘되지 못하기도 한다. 어떤 감독은 관습적인 상업영화 법칙을 기존의 자기 방식과 절충한다. 반면에 다른 감독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최대한 집약해 승부수를 던진다. 김현정 감독의 첫 장편 <흐르다>는 후자의 방향을 취한다. 자신의 지난 작업이 일관되게 형성해온 색깔을 집약한다. 누가 봐도 감독의 이름 세 글자가 또렷하다.

진영30대에 진입한 취업준비생이다. 목표는 늘 멀리, 가능하면 해외로 떠나는 것이다.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가끔 일을 거들며 용돈을 벌지만 공장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 먼저 결혼해 분가한 언니와 달리 독립할 의지가 뚜렷해보이진 않는다. 언론고시 스터디 모임에 나가고 인터넷 영어회화 강의도 듣지만 취업에 필사적인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다. 가족 관계는 화목하진 않다. 진영은 집에서 늘 웅크린 존재다. 엄마는 고집 세고 배짱만 부리는 아빠를 도와 공장 운영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열등감 가득한 아빠는 무리하게 공장에 투자하느라 엄마와 자주 다툰다. 진영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하지만 그런 가족형편을 보여준 뒤 영화는 고작 1/3 지난 시점에서 엄마의 부재가 닥친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온 가족에게 거듭 위기가 닥쳐온다.


엄마를 통해서만 연결되던 진영과 아빠는 이제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진영은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에 턱걸이 합격해 출국 준비 중이다. 하지만 경영을 책임져온 엄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장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는 지금껏 없던 적극성을 발휘해 현안 해결에 일조한다. 엄마의 빈자리를 출국 전까지는 성실히 수행하려는 것이다. 아빠 역시 딸이 기특한지 무뚝뚝하지만 인정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아빠는 젊고 총명해 보이는 공장장을 데려와 전적으로 신뢰를 보낸다. 진영은 엄마의 자리를 자기 대신 새 공장장이 차지하자 시원섭섭하다.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한 대출을 쓰던 공장은 납품처의 횡포로 경영난에 휩싸인다. 언쟁 중 아빠의 폭언에 발끈한 진영은 격렬한 분노를 토해낸다. 얼마 후 은근슬쩍 도움을 청하는 아빠를 도와 공장 정리에 나서지만 미련을 버리지 않는 아빠의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영화의 한글제목은 <흐르다>. 첫 번째 장편의 제목이란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그런데 제목을 듣는 순간 일본 고전영화 4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6년 동명 영화와 본 작품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분석하게 된다. 그 직감은 별로 틀리지 않다. 물론 영화 속 내용이 겹치진 않지만, 우리가 흔히 나루세 미키오 영화 공통 코드로 언급하는 요소들이이 <흐르다>에서 쉽게 확인된다. 여성 주인공+가족 중심 소재+굵직한 사건 전개 대신 인물들의 응축된 감정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전개 같은 나루세 미키오의 주요 특징들을 헌정하듯 따른다. 21세기 한국사회로 배경을 옮겨 거장에 대한 헌사시도라 해도 위화감이 없다.

그에 비해 영문제목 '모래 위의 집'은 직접적이다. 사회적 쟁점이 중심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는 21세기 들어 축소 및 해체가 진행 중인 정상가족공동체의 초상과 함께 위기에 처한 지방도시와 중소기업의 풍경이 가득하다. 아빠가 보는 텔레비전 뉴스에선 지역의 경제위기가 수차례 반복 등장한다. '경상도 마초' 전형대로 목소리 크지만 실제로는 귀가 얇고 쉽게 휩쓸리는 아빠 캐릭터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상이다. 공장 살림을 책임져온 엄마의 급작스런 부재는 위태롭던 균형을 일거에 뒤흔든다. 엄마에게 책임을 미뤄왔던 부녀는 좋든 싫든 대면해야 한다. 그들 앞에 놓인 위기가 만만찮다. 작은 공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뜨내기 인력으로 겨우 지탱 중이고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공장 사무직원이건 스터디 구성원이건 기회만 되면 타향으로 탈출을 도모한다. 지방의 위기는 서울보다 훨씬 복잡하고 더 낯설다.

그 위태로운 상황을 영화는 지독히 섬세하게 풀어낸다. 주인공 진영의 분노는 늘 꾹 눌러 참다 마침내 터뜨리는 형태라 직전까지는 마치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수면 아래에선 격하게 부딪히는 내부파도와 같다.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녹아들었을 이야기 전개는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는 부모세대와 질식할 것 같지만 조건상 불만을 분출하지 못하는 자녀세대 간극을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일정한 성취를 이룩한다. 감독의 예전 단편에선 주인공이 단독자로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장편에선 딸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부녀가 버디무비처럼 공동 주인공에 가까운 형태로 확장된다. 그렇게 <흐르다>는 서로 간격을 벌린 채 반복되는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던 아빠와 딸이 직면하고 충돌하는 상황을 묵직하게 풀어낸다. 상류에서 하류로 강물이 흘러가며 유속은 느려지지만 수량은 증가하는 것이 연상되는 서사와 전개다.


단조로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변주를 주고자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수미상관을 의도한다. 영화 시작에서 주인공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본다. 이때 거울은 수증기로 부옇게 흐린 상태다. 모든 게 불확실한 주인공의 상태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말미에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산전수전 겪은 상태를 반영하듯 거울 표면이 매끈하게 주인공을 비춘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전달이다. 일상의 소소하게 위력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남용되지 않으면서 이정표 노릇을 해낸다. 마치 보물찾기 시험처럼 기능한다.

2시간 내내 흔히 상업영화들이 취하는 스펙터클과 신파의 순간은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현실 인물들을 투영하는 풍경만 가득하다. 실제 진영은 저런 모습일 것 같고, 아빠는 '경상도 아재' 민낯 그대로다. 엄마와 언니 역시 '현실가족' 분위기에 찰떡궁합이다. 그렇게 영화는 잔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격렬한 가족 간 대립을 쇠락해가는 지방도시 대구와 청년실업 시대 취업준비생 풍경을 배경 삼아 거대한 풍속화로 그린다. 영화 후반 어떤 결정적 찰나에 주인공 얼굴에 감독이 덧입혀진 것처럼 보이는 'Magic Hour'가 분명히 존재한다. 배우의 얼굴은 감독의 얼굴로, 다시 배우의 얼굴로 돌아온다. 정말 그렇게 보인다.




*본 작업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영화 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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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다
2021 | 김현정 | 123분
촬영 김용현

출연 박지일 , 이설 , 안민영 , 박지수